화론 단상
화론단상(畵論斷想)
동양의 화법에 ‘홍운탁월(烘雲托月)’이란 게 있다.
직역하면 ‘구름을 불태워 달을 의탁한다’는 말이고,
의역하면 ‘구름을 불처럼 선명히 밝혀 달을 그려낸다’는 뜻이 된다.
직역이든 의역이든 무슨 말인지 좀 알송달송하다.
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.
수묵화를 그릴 때 달을 그리자면 딜레마에 빠진다. 왜냐고?
달은 희다. 검은 먹빛으로 달을 그릴 수는 없다.
그래서 달을 그리기 위해서 달 아닌 것을 그려준다.
밤하늘을 보라. 달 아닌 게 무엇이 있나?
우선 구름이 있다. 달 주위의 짙은 어둠도 있다.
좀 더 멋을 부리자면 달빛을 살짝 뚫고 올라온 매화 가지, 혹은 솔가지 하나도 상상할 수 있다.
이것들을 열심히 그리다 보면 마지막에 달은 저절로 그려진다.
홍운탁월이란 바로 그런 뜻이다. 이 말을 줄여서 '홍탁'이라고도 한다.
예전에 한문 배우던 선생님께서 이걸 설명하면서 말 뒤끝을 흐린다.
“홍탁이라... 그런데 홍탁이란 또 홍어 안주에 탁주 한 잔이란 뜻도 되지, 허허허!”
결국 그 날 선생님과 홍탁 하는 집을 찾아가 늦도록 술을 마셨다.
그림에 관심이 많던 내가 이 홍운탁월에 대해 자꾸 물고늘어지니까 선생님이 또 한 말씀하신다.
산중의 스님들이 수행을 할 때도 홍운탁월은 좋은 가르침이 된단다.
수행이란 게 궁극에는 ‘나는 무엇인가?’ 하는 화두를 향해 치달아가는 기나긴 고행이 하니던가!
그런데 오로지 내가 무엇인가?, 하는 문제만 골똘히 생각하다 보면
오히려 미궁에 빠져 결국 자기 자신을 찾는 데 실패하기 쉽다고.
그럴 때 홍운탁월은 훌륭한 지침이 된단다. 즉, 자기를 찾기 위해 허우적거릴 게 아니라
자기 아닌 것을 하나씩 덜어내는 것! 그러다 보면 종국에는 자기만 남는다는 얘기다.
그림을 그리다 뜻대로 안될 때 나는 가끔 홍운탁월을 생각하곤 한다.
‘그것’이 잘 안 그려질 때 ‘그것 아닌 것’에 집중해본다. 그러면 보이지 않던 그것이 보일 때가 더러 있다.
물론 항상 그런 건 아니다.
어쨌거나 홍운탁월, 그리지 않고 그린다는 것! 뜻을 되새기면 되새길수록
나 같은 범부의 뒤통수를 강하게 때리는 죽비소리 같은 가르침이다.
살면서 이런 가르침을 늘 맘에 새기는 것도 좋은 일이다. 그러나 그게 어디 말같이 쉬운 일인가?
내 속에 웅크리고 있는 내 것이 아닌 숱한 망상들, 내 것이 아닌 온갖 욕망들이
마구 뒤엉켜 삶을 누추하게 만들지 않던가.
하지만 그 누추한 것들도 알고 보면 우리 삶의 소중한 단면이 아니던가.
그럴진대 차리리 때론 홍어 안주에 탁주 한 잔... 홍탁이라 해도 좋겠다.